| - 이 글은 경기의왕광장 문화예술방(쉼터)에서 함께 입력된 왕곡-김창호님의 글입니다. |
1장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
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
此兩者, 同
出而異, 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
道可道非常道, 새 길 닦을 수 있으니 늘 그길 아니어라
(도의 길을 갈 수 있으니 늘 가던길 아니구나)
名可名非常名. 이름 지을 수 있으니 늘 그 이름 아니구나
(이름 지을 수 있으니 늘 부르는 그 이름 아니로다)
도를 도라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도올)
혹은 도를 도라하면 영원한 도가 아니다(다수의 번역)라고 흔히 읽으려 한다.
과연 그렇게 읽는 것이 타당한가.
道와 常道는 다르다. 常道는 이미 널리 퍼져 있는 누구나 걷는 길이다.
여기서 常은 영원을 의미하기보다는 '늘' '언제나' 를 의미한다.
인간의 사는 도리는 소위 성인군자를 자처하는 현자들에 의해 무수히 많은 이름을 달고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사람 사는 참 길은 사랑을 실천(仁)하는 것이다. 義롭게 사는 것이 사람사는 길이다. 德스러운 삶이 사람 사는 참 길이다. 무릇 사람은 禮가 있어야 하고 부모를 공경하며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다. 모름지기 군자는 이러이러 해야한다는 식의 무수한 가르침들이 사람사는 길로 안내된다. 사람답게 사는 길을 찾아 나서는 것, 그것이 길(道)이다. 이미 전통과 선조들에 의해 끊임없이 가르쳐왔던 그 길을 일컬어 常道라 한다. 누구나 그렇게 가는 당위의 길 말이다.
그런데 노자는 도의 길을 제대로 갈 수 있으려면(道可道) 흔히 가는 그 길이 부정되는 곳에 있다고 한다. 常道가 부정되는 非常道일 때 비로소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다는 말이다. 아니 새 길을 가는 것이 가능한데 그 길은 늘 가는 그 길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미 누구나 가는 그길을 부정하고 새로운 길을 닦는 일. 그것이 道可道이니 도의 길을 닦는 것이다. 그 길은 넓고 가는 사람이 많아 상도(常道)요 도가도의 길(새로운 길을 닦는 일)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
노자 시대의 常道는 대표적으로 儒家가이며 仁義의 길이 큰 길이며 그것이 그 시대의 지배이데올로기였다. 제자백가들의 가르침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라고 훈육되었다. 조선의 성리학도 선비, 곧 군자의 길이었고 임금은 유학의 가르침을 따라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게 그 시대의 大義(사람이 마땅히 행하고 지켜야 할 도리)였다.
따라서 상도가 부정(非)되는 도덕경은 이단사설이 될 수밖에 더 있었으랴. 조선 시대에 도덕경이 각광받을 수 없는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비상도의 의미를 조금 더 확대해석 하면 지금 내게 지식으로 와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부정되어야 할 常道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서던 깨달음의 형태를 띄고 왔던 이미 와 있는 것은 다음에 올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 때의 양식이 지식으로 머물러 있다면 이는 버려야할 그 무엇이다. 새로운 길을 닦는 이는 그 지식에 오래 머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 길을 가게 마련이다. 오래 머물러 있는 지식은 당위의 형태를 띄고 타인에게 전달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지나 온 길은 그에게 常道가 된다. 앞의 것이 부정(非)될 때 여전히 새 길을 갈 수 있다. 도덕경을 따라서 말하면 새로운 길(무위의 도)을 갈 수 있으려면 늘 가던 그 길(유위의 도)을 버리게(非) 된다는 말이다.
名可名非常名
도가도비상도의 문장이 위와 같이 읽혀진다면, 名可名非常名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읽어낼 수 있다. 이름을 이름지으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도올) 혹은 이름을 이름지으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는 식의 해설이 정통이라는 이름을 달고 널리 알려져 있다.
道可道가 새로운 길을 닦는 일(비로소 자기 길을 갈 수 있다)로 읽혀진다면, 名可名非常名도 동일한 방식으로 읽혀진다. 먼저 常名에 대한 이해다. 常名은 영원한 이름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늘 부르는 이름이다. 이미 불려지고 있는 이름이다. 누구나 부르고 있는 이름들이다. 왜 하필 도와 명이 나란히 나오는가. 길을 가려면, 사람답게 사는 길은 이러이러한 것이라는 이름을 통해 길이 제시되고 길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답게 사는 길은 大義를 이루어야 한다고 할 때 대의라고 하는 이름을 일컫는다. 常道의 길목에 있는 각종 팻말 혹은 신호등이 이름이다. 예를 들면 仁이라는 名, 義라는 名, 禮라는 名 들 말이다. 사람답게 살려면 이렇게 이렇게 해야한다고 할 때의 '이렇게 이렇게'가 곧 명이다. 사람의 도리, 길을 갈 때 길을 안내하는 안내문이 명이니 어쩌면 당위의 명령들이요, 율법의 세계라 이름해도 지나치지 않다.
여기서 名은 사물에 이름을 붙히는 개념화과정에서 개념과 대상, 대상과 물자체의 관계, 그리고 각종 질료를 통합해서 인식하는 인식주관의 인식론적 한계 논란으로 확대해석 할 필요가 없다. 이름을 이름붙히면 그 이름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는 해석은 인식론의 한계와 더불어 거기 있는 그것은 말해지는 순간 이미 변화하고 있어서 그게 아니다는 식의 논란으로 향한다. 물론 그러한 현대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걸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이 문장이 의도하는 게 그 지점이었을까?
다시 해석해보자. 상명은 길을 가는 이들에게 당위의 명령으로 작용한다. 사람답게 사는 길은 인을 실천해야 한다. 누구라서 이 말에 이의를 달 수 있는가. 하여 모두가 그러하다고 받아들이고 이를 늘(常) 실천하려한다. 사람답게 살려는 길이 거기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로운 길을 닦는 이들은 새로운 길의 名이 있게 마련이다. 이전의 상명이 그러한가 묻고, 그것이 과연 그러한가 다시 묻는다. 그러면서 기존의 명에 대해, 그건 아니다고 非한다. 부정한다. 仁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상명으로 불려지고 있는 仁이라는 이름이 담고 있는 그 仁을 부정하는 것이다. 다시 닦는 길에서 보여지는 仁은 그런 仁이 아니라는 것이다.여기서 비상명이 이루어진다. 상명이 부정되면서 새로 이름이 드러나고 그 드러난 이름을 소통의 도구로, 새로 닦는 길의 신호등과 같은 팻말로 쓰는 것을 일컬어 名可名 곧 새로 이름짓는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名可名非常名은 道可道非常道와 단순히 호응관계 이상으로 짝을 이루고 있는 문장이다.
새로운 길을 닦으며 자기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지어진 이름에 종속되지 않는다. 스스로 이름짓는다. 사랑을 해야 한다는 기존의 이름에 종속되지 않는다. 아, 이런게 사랑이로구나. 사랑을 해야 사람답게 사는 길이라는 常名에 의한 仁은 有爲인 게 분명하더라. 새로운 길에서 無爲의 仁을 알게 된다는 것이며 이 때 새로운 仁이 名可名 곧 비로소 이름을 이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새로운 길에서는 새로운 길의 이름을 이름짓는다는 게 名可名非常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