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을 생각한다. 2009년 5월 29일,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이 있던 날이다. 그가 가는 마지막 길을 보기 위해 거리로 나온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숨막히는 더위와 쟁쟁한 햇볕이 사정없이 쏟아진다.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분노하고, 누군가는 쓰러지는 5월의 오후. 그 속에서 검은 정장 차림의 한 중년 남자가 맨바닥의 계단턱에 주저앉는다. 또 누군가 탈진했구나, 생각하며 돌아보면 낯설고도 익숙한 그 얼굴은 다름아닌 유시민이다.
유시민. 친노파의 핵심. 노무현을 사랑했고, 노무현으로부터 사랑받은 남자. 언제 어디서나 노무현의 편이었고, 노무현을 지키기 위해서 정치판에 뛰어든 노무현 지킴이. 그런 그가 노무현을 잃고 거리에 주저앉아 있다.
유시민을 발견한 사람들이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생수를 건네며 휴지를 건넨다. 하지만 유시민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들면서도 아무런 표정이 없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사람들이 주위에 몰려들어도 유시민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 같다. 결국 누군가 '쉴 수 있도록 가까이 가지 맙시다.' 말을 하자 사람들은 유시민을 둘러싸고 그늘을 만들어 준다. 마지막까지 한결같은 믿음과 신뢰를 가슴에 품었던, 유시민의 슬픔이 사람들을 움직이는 순간이다.
한동안 유시민에 대해서 생각했다. 실은, 유시민이 노통의 곁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걸 알고 있다. 만약 시간이 지나는 동안 유시민이 노통과 다른 길을 걸었다면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유시민을 좋아한다.'라고 말하는 게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유시민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은, 대신 울어줄 사람이 필요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라면, 울지 않기 위해서 생각할 무언가가 필요했던 건지도.
출세를 꿈꾸던 소년이, 바리게이트 앞에 선 청년이 되기까지유시민은 경주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가난한 집안의, 2남 4녀중 다섯번째 아이였던 유시민은 가난이 싫어서 법관이 되려는 꿈을 꾸었다. 자신이 아는 한, 판사가 되는 것이 가장 빨리 출세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유시민은 누가 장래희망이 뭐냐고 물으면 판사라고 답했다. 그래서 유시민은 서울대 사회계열에 원서를 냈고, 어렵지 않게 합격을 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간 후, 유시민이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생각하고 이야기 나누고 의문을 품는 것이 금지되어 있던 사회적 업악이었다. 그 억압 속에서 유시민은 공부하되 행동하지 않는 학생이 되었다. 유시민은 자신이 결코 행동할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에 빠졌고, 아무리 싸워도 유신 독재를 무너뜨릴 수는 없을 거라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이 유시민을 행동하지 못하게 했고, 그래서 그는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한 채 신입생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유시민이 판사의 꿈을 버리고 사회적 억압과 맞서 싸우길 택한 것은 대학교 2학년에 올라가던 무렵이다. 야학 선생이 되어 어린 노동자들의 생활을 엿보면서 유시민은 진정한 가난을 만났다. 그리고 굶고 살아본 적도 없고, 스스로를 먹여 살려야 했던 시절도 없었으면서 출세를 위해 나라의 녹을 먹는 판사가 되기를 희망했던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법학과 대신 경제학과를 선택했고 그 때 처음으로 타협의 길 대신 투쟁의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어린 시절 이야기와 대학 시절 이야기는 유시민이 쓴 <서른살 사내의 자화상>을 참고하였다. 전문을 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해 주소를 함께 올린다. 다만, 원본을 찾을 길 없어 유시민의 팬클럽 사이트인 '시민광장(
http://usimin.co.kr/)에 올라왔던 글의 주소를 올린다.)
http://usimin.co.kr/2030/bbs/tb.php/ANT_T200/292260
<script language=JavaScript>
</script >
: 유시민, <서른 살 사내의 자화상>
이후 유시민은 망설이지 않고 투쟁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투쟁 속에서 평생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유신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암살당하며 유신 체제는 무너졌고 그 속에서 유시민은 역사는 발전한다는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유신 체제가 무너져도 민주주의는 오지 않았다. 1979년 12월 12일, 정권을 장악한 것은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이었다. 이듬해인 1980년 5월,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유시민 역시 이 시위에 앞장섰다. 결국 5월 17일 당시 서울대학교 3학년 학생이던 유시민은 체포되었고 이 밤에 계엄군은 전국의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구금된 지 석 달만에 석방된 후, 다시 강제로 군대에 끌려가 2년 8개월을 보내고 나온 유시민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여전히 군부 독재에 시달리고 있는 대한민국이었다.
미농지 넉 장과 먹지 석 장의, <항소이유서>
유시민이 두 번째로 투옥된 것은 1984년 9월, 일명 '서울대 프락치 사건' 때이다. 이 사건은 유시민을 제도권에 데뷔시키는 계기가 되지만, 평생 동안 유시민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를 괴롭히는 꼬리표가 되기도 한다.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란 1984년 9월 17일부터 9월27일까지, 수사 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은 네 명의 가짜 대학생을 서울대학생들이 감금하고 폭행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알게 된 경찰은 수사에 착수해, 10월 4일 서울대 복학생 협의회 집행위원장이던 유시민을 구속했다. 유시민은 직접적으로 폭력을 가한 바가 전혀 없었으므로 미리 도피하지 않았고, 도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먼저 체포되었다. 유시민은 폭력을 행사하기는커녕 이 사건을 알고 앰블런스를 불렀으며, 피해자들 중에는 유시민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결국 이 일로 인해 복교 이후 한달 만에 재수감되어 다시 재적을 당해야 했다.
<항소이유서>는 바로 이 때 유시민이 감옥에서 썼던 글이다. 역시 전문을 궁금해하는 분들을 위해 '시민광장'에 올라와 있는 글의 주소를 함께 올린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널리 회자되고 있는 명문의 글이므로, 읽어들 보시기를 권한다
http://usimin.co.kr/2030/bbs/tb.php/ANT_T200/3315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