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글은 산벗 산행후기에서 함께 입력된 아사달의 봄님의 글입니다. |









겨울산은 소리의 향연이요, 아우성이다
꼬불꼬불 산길을 지나 도착한 남한산성의 남문, 멋들어진 자태가 나를 반긴다. 파란하늘가에 살포시 손 담근 듯이 날렵한 처마의 곡선이 아름답고, 세월의 무게 고스란히 간직한 석축이 또한 그렇다. 구름 한 점 찾을 길 없는 파란 하늘과 울긋불긋한 단청의 조화로움도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자연과 어우러진 선조들의 멋스러움에 취해있을 때 열어젖힌 성문을 비집고 바람이 분다. 헝클어지고 잡스런 마음 일거에 걷어가는 차디찬 바람이 불어온다. 어떡해 말을 해야 저 쨍하고 시린 바람을 표현할까. 몸을 스쳐가는 바람이 아니다. 시원하다 말할 수 있는 바람도 아니다. 드러난 피부를 할퀴고 간다. 맹수의 감춰두었던 발톱이 전광석화처럼 바람으로 덮쳐오고, 할퀴고 간 자리, 어쩌면 이내 붉은 피 뚝뚝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하게한다. 멀리 얼어붙은 한강을 소리도 흔적도 없이 건넌 바람은 겨울산을 스멀스멀 기어올라 마침내 열어젖힌 남문 틈새를 파고들며 맹수의 본성을 깨워 그렇게 불었다.
겨울이 깊고도 무섭게 내려앉은 남한산성, 꽁꽁 얼어붙은 성벽을 따라 걷는다. 산성의 발아래 놓인 도시도 겨울이 가득하다. 빌딩의 굴뚝에선 연신 희뿌연 연기를 토해내고, 칼바람에 종종걸음으로 바쁜 사람들도 하얀 입김을 뿜어낸다. 눈 쌓인 산성과 빌딩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그리고 사람들의 입김까지 겨울은 온통 하얗다. 사람들의 마음도 저리 하얗고 순수하면 이 겨울이 얼마나 따듯하고 훈훈할지. 남문에서 나를 환대하던 바람이 능선을 타고 올라와 어느새 내 앞에 섰다. 쏴아 바람이 분다. 소리도 요란하고 몸짓도 요란하다. 바람이 이는 모습대로 눈보라가 인다. 얼굴을 때리며 밀려오는 눈보라에 세상이 하얗다. 바람의 기세가 등등해 질수록 두 볼은 그 붉음을 더해가고, 귀는 떨어져 나갈듯이 아리다. 귓전을 때리는 바람과 그 웅성거림으로 머리가 찡하다. 이 얼어붙은 산꼭대기 무엇을 하려 찾았느냐 묻기라도 하듯 귓가에서 바람이 춤을 춘다. 시야에는 눈보라가 무명천 휘두르며 춤사위가 요란하고, 귓등에는 바람이 걸터앉아 노랫가락이 걸 판지다.
좌익문을 좌로 돌아 오르고, 오른 만큼 내려가길 몇 번 북풍한설에도 그 푸름을 잃지 않은 소나무가 당당하고 멋지다. 파란 하늘가에 초록으로 아름다운 솔가지 하나, 일필휘지의 당찬 기운 바람타고 넘실넘실 춤사위로 되살아나고, 걷는 걸음마다 뽀득뽀득 서걱서걱 자지러질듯 눈 밟는 소리 솔숲을 채운다. 겨울 숲은 온통 소리의 향연이요, 아우성이다. 휘익~휙 바람이 댓거리 하듯 요란하고, 발아랜 서걱서걱 서릿발 부서지듯 언 눈이 소리친다. 우익문을 향해 걷는 내내 소리란 소리 온통 남한산성으로 모여들어 제 잘남을 자랑하는 듯 요란하고 소란하고 번잡해 귀가 먹먹하다. 우익문의 솔숲은 그렇게 소리로 깨어나 하얗게 얼어붙은 세상을 초록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우익문을 지나 수어장대 오르는 길, 성벽 너머 보이는 송파나루도 깊은 겨울잠에 빠져들어 고요하기 그지없고, 흐르는 강물 따라 시선을 남으로 돌리면 그 옛날 강변에 누각 세우고 세월을 낚던 양반님도 간데없고, 기러기에 갈매기들 앞 다퉈 날아오르던 그 누각도 간데없어 세월의 무상함만 허허로움으로 되살아와 바람만 가득한 압구정도 추위 속에 움츠리고 하릴없이 졸고 있다. 오가는 몇몇 자동차가 아니라면 빛바랜 앨범 속 흑백사진 같다. 왼쪽 어깨위엔 겨울이 무색한 푸른 솔가지 들쳐 메고, 오른쪽 팔 아래엔 무채색 콘크리트 도시를 거머쥐고, 하얗게 얼어붙은 수어장대 오르는 길엔 찢어질듯 아우성치는 오방색의 군기가 펄럭인다. 수 백 년의 시간을 관통하는 바람이 군기를 흔들고 있었다.
수어장대를 휘휘 돌아 내려오는 길에도 바람은 여전하고 귓가를 떠도는 소리도 여전하다. 손은 얼어붙어 얼얼하여 감각도 무뎌지고 얼굴도 추위에 곱아 말이 샌다. 두터운 외투를 뚫고 스며드는 바람은 그 기세를 더하고 뉘엿뉘엿 서산을 향하는 햇살은 그 온기를 잃어 밍밍하기 끝이 없어 간이 덜된 국물을 맛보듯 싱겁고, 풋내 나고, 보기에도 딱하다. 등을 떠미는 바람의 손끝이 매섭다.
“가라, 가라. 어서 내려가라. 햇볕도 다하고, 바람이 거세지면 산꼭대기는 이미 산자의 자리가 아니다. 죽은 자가 달그림자로 떠도는 죽은 자의 세상이다. 가라, 가라. 어서 내려가라!!”
등 떠밀려 재촉한 하산 길엔 참나무며, 소나무며, 바람과 햇살 그리고 바닥에 납작 엎드린 얼음까지 부딪히던 토해내던 제 각각의 소리들로 가득했다. 귀 닫고 바라보는 겨울은 온통 죽음 같은 고요지만, 귀 열고 바라본 세상은 소리의 향연이요, 온갖 아우성이다.
시리도록 쨍한 겨울 하늘을 퍼렇게 날을 세우고 번뜩이는 칼날로 바람이 분다. 바람 불어간 자리 칼자국 같은 상채기 나면, 그 상채기를 비집고 또 다른 바람이 분다. 실눈을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라. 푸른 하늘가 어딘가에 바람이 비집고 들어오는 시린 상채기가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