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동자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도요한 신부께서 엊그제 이 땅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셨습니다.

1937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나 1956년 처음 한국 땅을 밟아 1959년 광주 살레시오 고등학교 영어교사를 잠시 했던 도신부는 1962년 사제서품을 받고 다시 한국을 찾은 후 영등포 공장지역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에 나섰습니다.
1971년 전태일 분신사건 후 천주교 서울대교구에 노동사목위원회를 설립하고 이후 종로성당에 노동사목회관과 명동에 외국인노동자상담소를 여는 등 한국 노동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분 입니다.
또한 1990 년대 부터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 노력해 왔고 몇 년 전부터는 다문화 가정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저들이 이 사회에서 인간존엄을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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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돈보스꼬청소년센터/직업기술학교에 있으시면서 산업화에 내동댕이 쳐진 불우청소년들에게 잠자리와 먹거리를 제공하고 기술을 가르쳐 저들이 악에 물들지 않고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훌륭히 자리잡을 수 있도록 돌봤습니다.
그런 그분은 불우청소년들의 아버지이자 한국노동자들의 아버지였습니다.
1993년 신장암으로 한쪽 신장을 떼고 나머지 신장도 종양으로 절반을 떼네 매주 두 번씩 투석을 해야 했고 2004년엔 척추암까지 걸려 척추뼈 이식수술까지 받은 중환자임에도 아픈 기색 하나 없이 늘 밝고 의지에 찬 모습으로 노동 현장에 계셨던 분입니다.
이 땅에 발을 디딘 그 50여년 전에도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지만, 그 암울한 군부개발독재에서 박대 받던 노동자들과 침식을 같이 하고 암투병 중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노동자들이 있는 곳 어디나 다리를 절룩거리며 차 하나 없이 대중교통으로 저들에게 다가갔던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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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옷 몇 벌, 그분이 가진 재산의 전부인데 평생을 검소하게 살면서 그분이 늘 했던 표현 그대로
자신의 나라, 청소년기 까지를 제외하고는 평생을 살았던 나라,
그분의 ‘우리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분.
엊그제 돌아 가실 때도 책상에 앉아 책 집필 중에 조용히 가심으로서 최후마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그분은 자신의 시신마저 기증하며 모든 것을 남기고 가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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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절 그분이 사제로써 첫 번째로 부임한 성당에서 처음 뵈면서 시작된 그분과의 인연.,
그 어느 날,
어린 제가 의지할 곳 없어 거리를 헤매 일 때 거두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도와 주셨던 분.
고단한 삶의 한계에서 주저 앉으려 할 때 용기를 주셨던 분.
그는 제겐… 은인이자 스승이며 아버지였습니다.
그런 그분이기에 오늘 앰블런스에 실려 떠나시는 마지막 모습을 보며
그만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ㅜ.ㅡ
아버지.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이제 그 무거운 짐 다 내려 놓으시고 평안히 가십시오…………………….
(아래는 오늘 경향신문에 실린 내용입니다)
[여적]도요안 신부 유병선 논설위원
“가난한 사람들이 늘 너희 곁에 있으니 너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들에게 잘해 줄 수 있다.”(마르 14.7) 가톨릭 살레시오 수도회의 미국인 도요안(본명 잭 트리솔리니) 신부는 이 성경 구절을 끌어내 지난해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을 것이다>라는 책을 펴냈다. 1959년 한국과 인연을 맺어 1968년부터 이 땅에 ‘노동사목’을 개척한 도 신부가 이 책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성찰을 촉구한 것은 가난한 이는 누구이며, 그들에게 어떻게 잘해 줄 수 있는가이다. 그의 지침은 어렵지도 요란하지도 않다. 가난한 이를 찾기 위해 “그저 눈을 뜨기만 하면 된다”는 그의 낮은 목소리가 큰 울림을 만들 뿐이다.
“행복했다.” 인권과 노동권이 개발과 성장의 광풍 속에 존재감조차 없던 1960~70년대의 어두운 시절, 도 신부는 ‘공돌이’ ‘공순이’ 곁에서 그들의 아픔을 들어주고 보듬어줄 수 있어 행복했다고 했다. 영등포 도림동 성당에서 어린 노동자들을 돌보던 도 신부는 1970년 전태일을 통해 한국의 노동현실에 눈을 뜨고, 이듬해 김수환 추기경의 권유로 서울대교구에 노동사목위원회를 만든다. 도 신부는 누구도 눈을 주려 하지 않던 전태일 친구들을 찾아나섰고, 하소연할 곳이 없던 전태일 친구들은 도 신부를 찾아왔다. 도 신부는 노동자의 친구일 수 있어 행복했다.
“항상 노동자의 편이 아니라, 노동자를 위한 올바른 방향의 편이라고 생각한다.” 권위주의 정권으로부터 ‘운동권 신부’로 몰려 탄압을 받았고, 이주노동자들을 소모품 취급하는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에 대해 성토도 했지만, 도 신부는 한국의 노동운동이 시대의 흐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따끔한 비판도 아끼지 않았다. 도 신부가 생각하는 노동자를 위한 올바른 방향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눈을 뜨는 것이고, 노동자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양산은 장기적 안목에서 오히려 사회에 마이너스 요인이다.” 도 신부는 지난해 7월 신장암과 척추암 투병으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노동사목위 기자회견장에 나와 비정규직 보호를 촉구했다. 늙고 병들었어도 그는 언제나 노동자의 친구였다. 1959년과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나라꼴은 번듯해졌지만 울산에선 비정규직의 절규와 하소연이 메아리치던 엊그제 도 신부가 우리 곁을 떠났다. 그는 영면했고, 우리는 눈을 뜰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