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으로 그제 도봉구민회관에서 있었던 유시민의 강연을 보았다. 유시민은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는 진보에 관한 3가지 정의를 설명했다. 충분히 설득력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뭔가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모호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보다 구체화된 표현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서, 진보와 보수에 대한 평소의 개인적 생각을 말해보고자 한다.
우선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보수와 진보는 인간이 가진 이기심(경쟁의식)과 동정심(연대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개체와 후손의 생존과 번영을 목표로 한 진화의 역사속에서 동물적 본능처럼 자리잡은 인간의 이기심 내지 경쟁의식은 자유경쟁을 선호하게 마련이다. 다른 한편, 개인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사회적 재난에 대처하기 위해 연대의 사회적 기술을 익혀온 인간과 그 선조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동정심과 연대의식또한 환경에 대처하는 중요한 심리적 동기의 하나로 발전시켜왔다. 이처럼, 경쟁의식(이기심)과 연대의식(동정심)은 인간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진화프로그램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내장한 본능에 가까운 심리상태라고 할 수 있다. 공산주의와 파시즘이라는 극좌와 극우의 역사적 실험이 모두 실패로 귀결된 이유는 그것이 거의 본능처럼 굳어진 인간을 움직이는 중요한 두가지 심리동인중 하나를 완전히 무시한 이론이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이기심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채 인간을 마치 연대의식만으로 살아갈수 있는 존재로 상정했기 때문에 실패했고, 그와 정반대의 이유로 파시즘 또한 실패했다. 결국, 극단세력으로부터 회색주의라는 비판을 받은 수정주의만이 오늘날 살아남게 되었는데, 이는 그것이 인간의 경쟁의식과 평등의식 모두를 있는 그대로 존중한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수와 진보가 인간의 마음안에 그 존재근거를 가지고 있는 이상, 앞으로도 구체적 시대상황에 따른 최적의 균형점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갈등하고 타협하면서 그 생명력을 유지할 것이다. 즉, 이념의 시대는 결코 종식되지 않을 것이란 것이 내 생각이다.(물론 이념만으로 모든 사회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대는 이미 종식되었다. 진보와 보수는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유력한 프레임의 하나일 뿐, 유일한 프레임은 될 수 없다.)
내가 이해하는 보수와 진보는 사회적 약자의 이익을 얼마나 대변하느냐 또는 평등을 얼마나 지향하느냐로 구분된다. 단순하지만 이것이 보수와 진보에 대한 가장 본질적 이해라고 생각한다. 국가권력은 집권자가 가진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므로 집권자의 이념성향에 따라 평등에 대한 침해자로도 보호자로도 나타날 수 있다. 보수적인 정권일수록 사회적 강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국가권력을 활용한다. 사람들간의 선천적 재능, 세습된 부, 행운 등의 차이로 인하여, 자유경쟁상태하에서는 경제적․사회적․정치적․문화적 제반영역에서의 불평등은 점점 더 심화될 수 밖에 없으며 이는 역사적으로 입증된 사실이기도 한데, 보수정권은 불평등의 심화를 위해 소극적으로는 시장의 자유경쟁을 그대로 방치하기도 하고, 적극적으로는 불평등에 대한 저항수단이 되는 시민의 기본적 자유를 탄압하기도 한다. 반대로 진보는 평등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국가권력을 활용하려 한다. 소극적으로는 시민사회에 대한 국가의 부당한 간섭을 자제함으로써 시민적 자유를 보장하며, 나아가 적극적으로는 자유경쟁이 가져오는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사적 영역에 대한 국가의 인위적 개입을 추구한다. 만약 보수와 진보를 자유경쟁이 가져오는 불평등을 완화하려는 국가의 사적 영역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어느 정도로 허용할 것인가에 관한 대립으로 이해한다면, 보수는 더 많은 자유의 실현을 위해 더 작은 국가를 지향하고, 진보는 더 많은 평등의 실현을 위해 더 큰 국가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보수 vs 진보"는 “자유 vs 평등” 또는 “시장 vs 국가”로 간단히 도식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국가권력이 평등의 실현도구로 나타날 경우에만 타당한 정의이다. 앞서 말했듯이 국가권력은 집권자의 이념에 따라서는 불평등의 실현도구로도 나타날 수도 있는데, 이때는 더 큰 국가가 반드시 더 많은 평등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러한 정의가 타당한 범위내에서, 국가의 적극적 개입은 그만큼 사적 자유를 희생시키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므로, 자유경쟁을 촉진하려는 보수 또한 분명한 논리적 근거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인간의 이기심(경쟁의식)을 추악하지만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이는 한, 자유경쟁을 억제하려는 국가의 적극적 개입은 일정한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논리가 타당성을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장에 대한 국가의 과도한 개입은 사회의 생산력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관념적 아름다움에 그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공산주의 몰락이 보여준 역사적 교훈이기도 한 것이다.
위에서 보듯이 진보와 보수는 진보 아니면 보수, 보수 아니면 진보라는 일도양단적 판단을 요구하는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 일정한 방향성과 정도로 표현가능한 상대적 개념이다. 극우와 극좌를 양 극단으로 하면서, 그 사이에 중도보수, 중도진보, 중도가 존재할 수 있고, 중도보수와 중도진보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보다 보수, 상대적으로 보다 진보가 있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상대적으로 보다 진보”라는 표현은 옭치만, “진짜 진보” 혹은 “가짜 진보”라는 표현은 상대적 개념인 진보를 절대적 개념처럼 사용했다는 점에서 틀린 표현이다. 그런 표현은 지나친 당위론에 빠진 탓에 범한 논리적 오류이거나, 고의적인 정치적 프로퍼간다일 뿐이다.
유시민의 정치적 노선은 “사회적 자유주의” 혹은 “유연한 진보”이다. 양자를 동일한 개념으로 보기도 하지만, 나는 서로 약간 다른 개념이라고 해석한다. “사회적 자유주의(사회자유주의)”는 중도진보 혹은 중도좌파라는 이념성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는 보수와 진보라는 정치이념의 스펙트럼중 한 지점을 지칭한다. 그러나, 유연한 진보는 이념의 위치를 표현한 것이라기 보다 이념의 실현방법에 있어서의 합리주의 또는 실용주의를 표방한 것으로 이해한다. 즉, 근본주의의 대칭개념으로서의 합리주의 또는 실용주의이다.(개인적으로는 합리주의라는 표현을 더 선호한다. 이명박과 정동영이 실용이란 말을 즐겨쓰는 바람에 “실용”이란 표현이 “내 멋대로”라는 의미로 변질된 탓이기도 하다.) 따라서, 유연한 진보는 현실적 진보 혹은 합리적 진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정치는 이상과 현실의 함수이므로, 그 중 어느 하나의 변수를 외면한 정치는 실패를 면할 수 없다. 이상을 외면한 채 현실만을 바라보는 정치는 그 존재의미를 상실한 결과가 되고, 현실을 외면한 채 이상만을 추구하는 정치는 이상의 실현무대인 현실로부터 괴리되어 이상을 공허하게 한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같은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보여준 서로 다른 선택은 이념의 차이로 인한 것이라기 보다, 전략적 유연성의 차이로 인한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이 노동자,농민,서민을 위한 진보정치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정치현실을 고려하여 이상을 잠시 접어둔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한 탓에 선거연합에 적극적으로 임한 것이다. 이를 신념의 배반으로 단정하는 진보신당 일부 당원들을 보면 그러한 시각이야말로 진보신당의 정치적 미성숙을 드러낸다고 말해주고 싶을 뿐이다. 객관을 초월하는 모든 주관은 허위이기 때문에, 어떤 고귀한 당위와 이념도 합리성과 현실성을 바탕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내가 유시민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유시민이 보여주는 정치이념(사회자유주의)과 그 구현방법(유연한 진보)이 모두 개인적인 선호와 일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유시민이 이미 스스로 인식하고 있듯이, 참여정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바탕으로 사회자유주의중에서 “사회”에 보다 강력한 방점을 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때로는 지나친 유연성도 문제일 수 있다. 지나치게 현실적이거나 전략적 것은 실제 부딪쳐 보기도 전에 미리 현실의 벽을 과대평가하여 이상의 과소실현을 가져올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참여정부의 오류중에는 이 두 측면에서 성찰할 수 있는 대목이 많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유시민이 정치적으로 성공함으로서 중도진보의 합리적 노선이 다시 대한민국을 이끌어 나가는 지향점이 되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