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2월의 어느 추운 날이었다. 아마도 대선 바로 다음 날이었을 것이다.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
선한 김대중 후보가 마포중앙당사에서 의원직 사퇴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있었다.
"이번 선거에서 국민의 신임을 얻는 데 실패한 것을 나의 부덕의 소치로 생각하며, 패배를 겸허한 심정
으로 인정합니다."
준비한 원고를 담담하게 읽어 나가는 그의 뒤에서, 도열한 의원들과 보좌진들이 조용히 흐느끼며 눈물
을 훔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정치인의 입에서 '부덕의 소치'라는 말을 들은 것이 이때가 처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그 전에 누군
가가 이 말을 썼을지 는 모르겠지만 내 기억 속에서는 이때 들은 것이 처음이다.
그 후로 이 말은 정치인, 고위공직자, 재벌등 이 사회에서 행세께나 한다는 사람들의 유행어가 되었다.
불법 정치자금을 받고 선거부정을 저질러 의원직을 박탈당한 의원님도 '부덕의 소치'요 위장전입을 하
고 부동산 투기를 하다 발각된 고위공직자도 '부덕의 소치'. 자식이 얻어맞고 들어 온 게 분하다고 조폭
까지 동원해서 사적보복을 일삼은 재벌회장님도 '부덕의 소치'를 읇조린다. 이제 이말은 감히 서민들은
써서는 안 될 것 같은 대한민국 상류사회의 고급언어가 되었다.
자신의 과실에 대해서 이 말을 당당하게 쓸 수 없는 당신은 이미 이 사회의 메인스트림이 아니다.
不德의 所致. 이말을 직역하면 '덕이 없거나 부족하여 생긴 일.'이 될것이다. 따라서, 여러가지 부정적인
사건을 평가할 때,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몸을 낮추어 겸손한 태도를 보이고자 쓰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청문회등에서 주류계층의 개나 소나 남발하는 이 말이 과연 적절한 표현인지 묻고싶다.
'덕이 없거나 부족한 것'과 '범죄행위나 파렴치한 행위'가 같은 것인가.
덕이 없거나 부족하다고 해서 범죄행위나 파렴치한 행위를 저지르지는 않는다. 청문회에 나온 이들의
행태는 덕이 없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누가 봐도 범죄자요 파렴치범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제라도 말을 바로 써야 하지 않을까.
'파렴치의 소치'요 '악행의 소치'요 '몰양심의 소치'라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돌아 보고 부끄러움을 안다면, 물러날 줄 아는 것이 그나마 '不德한 인간'으로 살아남
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