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 모임 토론 패널에 몇 분께서 추천해 주셨는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미안한 마음을 메우기 위해, 토론에 참여할 수 있었다면 시민광장 여러분께 드리고 싶었을 만한 얘기를 글로라도 정리해 올립니다. 토론 주제 중 <시민광장의 나아갈 방향>에 관한 생각입니다만, 다른 주제에 관한 생각의 출발점도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 연초 광장 활동을 시작한 이래 고양광장에서 '보물' 대접을 받아 왔습니다. 광장에서 '국보' 이상의 존재인 유시민 선생과 친구 사이란 점이 기본적 이유겠죠. 박물관에 보낼 만한 나이가 되었다는 점도 보물 대접에 한 몫 하는지 모르겠고요.
유 선생과 '친구' 사이라고 공언해 왔지만, 사실 우리 사회 통념에 따른 '친구' 관계는 아닙니다. "우린 친구야!" 선포한 적도 없고, 서로 말도 올리는 사이입니다. 유 선생이 국회의원(및 장관) 하는 5년 동안 얼굴 안 보고도 지냈죠. 형편이 안 맞았다면 서로 기억만 남긴 채 평생 다시 안 마주칠 수도 있었죠. 피차 꼭 챙겨야 할 대상이 아닌 겁니다. 우리 사회 통념으론 그저 '아는 사이'라 하는 게 보통이겠죠.
그럼에도 '친구'라 하는 것은 그분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됨을 저 자신의 방식으로 아끼게 되었으면 저는 '친구'로 여깁니다.
친구로 여긴다 해서 일방적으로 제3자에게 친구 관계를 공언할 일은 아니죠. 예컨대 제가 '선생님'으로 모시는 선생님 한 분을 마음속으로는 '친구'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그렇게 여기기 때문에 그분을 아직까지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분이 제 친구라고 떠들고 다니면 나이 여든이 다 되신 그분 마음이 불편하실 것 같아서 참고 지냅니다.
그런데 제가 유 선생에게 물어볼 필요 느끼지 않고 친구 운운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조건 덕분입니다. 첫째는 그분 역시 저와의 인연을 아끼는 구석이 있으리라는 짐작이고,(선생님과의 관계에도 적용되는 것) 둘째는 그런 마음에 '친구'란 이름 붙이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입니다.(선생님과의 관계에는 없는 것)
유 선생은 열 살 연상의 저를 "선생님"으로 칭하며 깍듯이 대합니다. 11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변함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그때부터 그분이 저를 마음속으로는 친구로 여기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에 대해서만이 아니죠. 연하의 보조 연구원들에게도 그분은 친구로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인 역시 친구로 여기는 태도야 쭉 보아 온 것이고, 아마 따님과 아드님에게도 그런 태도일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을 친구로 대하고 싶어 하는 그분의 자세는 위계 질서를 싫어하는 자유주의 기질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겠지만, 유럽 생활을 통해 더 분명히 체화되고 확장된 것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저는 그렇게 자유주의 기질이 아니면서도 '친구' 관계를 넓게 보게 된 것이 유럽 생활의 얼마간 경험 덕분입니다.
<별의 왕자>에서 제기된 '관계의 의미'를 벌써 떠올리는 분들이 있겠죠. 2차대전 후 유럽에서는 새로운 질서의 원리로서 '친구'의 의미를 넓게 보는 경향이 일어나 '68 혁명' 이후로는 하나의 강력한 표준으로 세워졌습니다. '친구'란 이름의 기본적 인간관계를 앞세워 모든 형식적 관계를 부차적인 위치로 밀어붙인 것입니다.
가정 운영과 개인 관계에서 유럽 통합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대' 정신을 뒷받침하는 인프라가 되어 있는 것이 인간관계에 대한 이 새로운 관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제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친구' 의식을 가지고 인간 대 인간의 유대감을 가지는 사회에서 많은 장벽들이 힘을 잃게 된 것입니다.
시민광장, 특히 고양광장에서 저는 유 선생을 친구로 여기는 것과 같은 차원의 친구들을 많이 얻었습니다. 유 선생을 "믿고 지지하는" 분들 가운데 자유주의 기질이랄까, 친구 관계 잘 맺는 성향을 유 선생과 공유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분들과 사이에서 저는 서로를 아끼고 받드는 마음으로 많은 즐거움과 가르침을 나눕니다.
그러나 이런 편안한 분위기만이 시민광장을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니죠.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들 중에는 불편한 마음이 비쳐져 있는 것이 적지 않습니다. 그 불편함을 모두 없앨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크게 줄일 수 있는 길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가짐에도 달려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경험의 부족 때문에 '친구 만들기'를 어렵게 생각하는 분들께 권합니다. 유 선생을 친구로 받아들여 주기를. 유 선생은 친구를 대단히 잘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시민광장이란 인연만을 통해 마주친 분들이더라도, 친구로서, 인간 대 인간으로서 마음을 열어주는 이들이라면 저절로 아껴주는 마음을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친구의 친구 또한 친구가 되는 것이지요. 유 선생과 친구로서의 마음가짐을 일으켜세우는 분들은 그 사이에도 서로서로 친구로서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믿고 지지하는" 마음보다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이 시민광장에 넘쳐나기 바랍니다. 그러면 '대통령 유시민'에 목숨 거는 '오버'도 없어지고, 노선이 명확하지 못하다 해서 불안해 하는 마음도 없어질 겁니다. "저 친구 다음에는 어떤 움직임으로 나올까?" 흥미로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그의 결정을 인간적으로 이해할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정치조직이냐, 팬클럽이냐 문제 제기가 그칠 날이 없습니다. 저는 팬클럽을 지지하지만, 팬클럽의 통상적 의미와 양태에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을 보완하는 길을 '친구'의 의미를 넓게 봄으로써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민광장에 "유시민과 함께 서로를 좋아하고 아끼는 친구들"의 친목회 기능이 자라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