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철도 피크는 대충 지났고 이제 시민광장도 다시 기지개를 펼 때가 되었습니다.
49재를 치룬 후 약 한 달의 시간이 지나고 나니 슬픔과 분노로 온통 뒤덮여 있던 머리와 마음이 이제야 좀 맑아지는 것 같습니다. 2주간의 개인휴가동안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였고, 그 결과물을 시민광장의 나아갈 길 중의 하나로써 이렇게 회원 여러분들께 제시해보려 합니다.
글의 특성상 경어체를 생략하겠습니다.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노무현 대통령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1. 노무현은 누가 죽였는가?
성공회대에서 열린 "다시 바람이 분다"콘서트에서 신해철이 객석의 관중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검찰? 조중동? 한나라당? 이명박? 당시 신해철이 이렇게 반문을 하곤 했다. 사람들이 저마다의 대답을 각자 내놓자 신해철이 냉소적인 표정과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였어요, 우리가 죽인 겁니다."
물론,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분들은 비교적 그 무고한 죽음의 책임에서 가장 자유로운 이들에 속해있는 분들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신해철의 이 냉소적인 답변에서 영감을 얻어 조금 더 논의를 확장시켜보고자 한다.
2009.6.21 '다시 바람이 분다' 공연 중에서, "개 ㅈ같은 새끼들! 두고보자!"
2. 노무현에게 조문을 한 사람이 500만명이나 된다고? 500만명밖에 안 되다니!
이명박, 한나라당, 조중동, 검찰들은 물론 노무현 시해사건의 주역들임에는 분명하다. 허나 나는 그들의 존재는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라고 생각한다.
신해철은 2002년 대선 당시 연예인들 중 명계남, 문성근을 제외하고는 가장 열렬히 노무현을 지지했던 이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랬던 신해철이 참여정부 출범 이후엔 노무현과 거리를 두고 어떤 때에는 노무현을 비판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의 새 앨범 노래가사에 그런 내용들을 삽입하기도 했었다.
그랬던 신해철이 왜 노무현이 죽자 1달동안 두문불출하다가, 마치 조선시대에 중죄를 지은 죄인이 자신의 상투를 잘리우고 이마에 문신새김을 당하듯이, 한번도 하지 않았던 삭발을 하고, 한번도 하지 않았던 문신을 그것도 자신의 머리 양쪽에 새기고 나타났을까. 왜 노래를 부르며 그토록 서럽게 슬피 울고, 왜 노래를 부르며 "개좃같은 새끼들, 두고보자!"라는 살기어린 외침을 내뱉었을까.
노무현의 죽음으로 그때까지 자신이 착각하고 있던 이 대한민국의 실체에 대해서 그는 섬광처럼 자각을 했던 것이다. 노무현이 대통령 되기 전에, 대통령 되고 나서, 그리고 대통령에서 물러나고 나서도 계속 맞서 싸워야 했던 적들의 존재는 자신의 상상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잔인하고, 몰지각한 존재였다는 것을.
한나라당 조중동 검찰 이명박따위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강력하고 사악한 존재에 맞서 노무현이 그 정도라도 해준 것이, 그야말로 노무현 자신의 모든 에너지와 힘을 다 했던 결과물이라는 것을, 노무현이라는 방패가 사라지자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던, 조선왕조시대 때부터 600년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기득권 세력의 힘과 무게와 몰지각함이, 불과 10년동안 김대중과 노무현이라는 두 철인의 존재로 인해 가까스로 봉인되어 있던 그들이 자신들의 세상을 만나 지금 얼마만큼 무도하게 활개를 치고 있는지 지난 1년 반의 세월동안 똑똑히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무현에게 그토록 미안했던 것이다. 그가 맞서 싸워야만 했던 적들의 존재와 본질을 너무나 과소평가했기 때문에.
그 점에서, 난 노무현이 죽음이라는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한 줄기 빛을 짜내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실체를 보여주었음에도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고 노무현의 죽음을 애닳아하여 조문을 나온 사람이 불과 500만명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가슴아프다. 적어도 2002년 노무현에게 한 표를 던졌던 1,200만명은 조문을 해야 됐었던 것 아닌가!
3. 이제 김대중과 노무현같은 철인에게 의지해서 진보하는 대한민국은 가능하지도 않고, 가능해서도 안 된다.
영웅의 길에는 크게 두 가지 길이 있다. "오래 살아서 자신이 악당이 되어있는 모습을 보던가, 일찍 죽어 영웅으로 남든가"
김대중은 전자의 길을 택했고, 노무현은 후자의 길을 택했다. 나는 두 철인이 영혼의 샴쌍둥이자 아버지와 아들같은 동지적 존재라고 생각한다. 사실 김대중, 노무현 중에 누가 더 위대한 사람인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차마 답을 못하겠다.
김대중은 자신이 욕을 먹더라도, 정략적이라는 비난을 듣더라도, 마키아밸리의 화신이라는 평가를 받더라도 대의를 위해서 소악을 실천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호남지역에서 공천헌금을 걷어 당의 재정을 풍성하게 만들었고, 당을 1인 독재체제로 만들어 공천헌금을 위해 영입한 호남지역 토호들을 자신의 카리스마와 리더십으로 통제했다. (김대중의 통제에서 벗어난 후의 호남지역 토호정치인들의 행태를 본다면 김대중 1인 독재체제의 당이 이후의 호남정치자영업자연합당보단 훨씬 더 건강하고 진보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동아를 통제하기 위해서 제왕적 대통령의 권능을 사용해서 국세청을 통한 세무조사를 단행했다. 과반수 의석을 만들기 위해 국정원을 동원해서 사정 드라이브를 걸어 찔리는 게 많은 한나라당 의원들을 협박하여 여당에 입당시켰다. 정권교체를 위해 유신잔당 김종필과 손을 잡았으며, 호남·충청 지역연합을 도모했다. 이 지역연합을 유지시키기 위해, 자민련을 원내교섭단체로 만들어주기 위해 민주당 국회의원을 꿔주는 희대의 정치코미디를 자행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신이 악당이 될지언정 세상을 바꾸는 길"을 그는 택했던 것이다.
노무현은 후자의 길을 택했다. 그는 당을 장악하는 것을 거부해서 자신때문에 만들어지고 성장한 당으로부터 내쫓김을 당했고, 권력기관을 장악하는 것을 거부했기에 임기내내 힘없는 대통령으로 전락했다가 결국 자신이 놔준 권력기관의 손에 의해 온갖 모욕과 조롱을 당하다가 죽음을 맞았다. 정몽준이 자리 나눠먹자는 제의도 거부해서 선거 전날에는 단일화 철회라는 비수를 등에 꼽혔다.
"우리 아이들에게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증거를 꼭 남기고 싶었습니다"라는 그의 외침은 결국 그가 무고하고 비통하게 죽음으로써 이루어지지 못한 꿈으로 남고 말았다.
4. 이제 또 다시 유시민에게 김대중과 노무현의 길을 강요할텐가. 그에게 두 사람이 지던 십자가를 대신 지워놓고 그렇게 악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또 하나의 총알받이로 내놓을텐가.
나는 지금 유시민이 너무나 깊은 고뇌와 두려움에 빠져있을 거라 생각한다.
정치적 아버지같았던 노무현이 이렇게 비참하게 삶의 종지부를 찍은 것을 보고서, 그를 따랐던 수많은 이들이 그야말로 물질적, 정신적으로 고문을 계속 당하는 것을 보고서, 그리고 그동안 노무현을 따르던 수많은 민초들의 마음이 이제 자신을 향해 서서히 움직이는 것을 보고서, 유시민은 어떤 생각이 들까?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까?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딸의 얼굴, 늦둥이 막내의 얼굴,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을까?
노무현을 계승한다는 것은 노무현이 겪어야 했던 그 모든 고난과 치욕 또한 계승해야 한다는 뜻이다. 심지어 너무나 비극적인 그의 죽음까지도 계승할 수 있다는 말이다.
"유시민이 나서면 밀어주겠다"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그의 입과 움직임만 기다리는 분들에게 나는 감히 이렇게 묻고 싶다.
"또 누구를 죽일려고!?"
시민광장의 목표는 유시민이 정치를 하지 않아도 진보할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민광장의 역할은, 유시민이 생명까지 걸지 않아도 정치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토양을 만드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시민이 선출직 선거에 나왔을 때에나 바람타고 우르르 모여서 써포트하는 그런 조직으로는 유시민에게도, 대한민국에게도 큰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일상 속에서 선의 연대를 실천하고, 시민주권운동을 실천하고, 학습하고, 끊임없이 네트워크화를 계속 진행하는 역동적인 조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 방법론적으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성찰하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
이제 그 고민과 성찰을 집단적으로 시작할 때라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