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여기까지 투쟁을 끌고 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이른바 개혁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진보세력도 마찬가지였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태가 발생하자, 좌우의 이념 차이를 떠나서 모두 당황하는 빛이 역력하다. <미디어오늘>의 이정환 기자가 이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서 보여줬다.
쌍용차 파산하면 노조의 책임일까?사측도 잘못했지만, 노조도 잘못하고 있다는 입장이 팽배한 것이다. 비단 이런 혼란은 상대적으로 진보를 표방하는 특정 언론의 문제만은 아니다. 전반적으로 쌍용자동차 투쟁에서도 이른바 진보개혁세력은 지리멸렬한 무기력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진보신당 게시판에서 쌍용자동차 투쟁을 노동자를 위해 당장 중단해야한다는 엄포가 올라오는 것 정도는 애교라고 봐줄 수 있다. 프레시안에 실린 다음과 같은 홍성태 교수의 칼럼을 보라.
쌍용차 진압은 제 2의 '광주학살'이다.
상당히 징후적인 글이다. 2006년 평택 대추리 상황과 2009년 쌍용자동차 상황을 대비시키면서 이명박 정부와 사측의 책임을 이끌어내려는 논리는 자기해체적이다. 게다가 다음과 같은 결론은 쌍용자동차 투쟁이 지금 진보진영에게 어떤 혼란을 주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지구화에 따라 경쟁이 계속 격렬해지면서 종신고용은 이미 오래 전에 옛이야기가 되었다. 노동자들에게 정리 해고는 언제나 나의 일이 아닐 수 없게 되었다. 고용 안정과 임금 인상을 위한 노력만으로는 노동자들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사회 전체적으로도 해고자, 실업자, 비정규직의 증가는 엄청난 불안의 증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을 주체로서 존중하는 기업과 사회 개혁을 위해 헌신하는 노동운동이 갈수록 절실해지고 있다. 그러니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어설픈 '기업 프렌들리'로 더 이상 나라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지 말라. 쌍용차는 우리에게 진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결국 '노동자를 주체로서 존중하는 기업'과 '사회개혁을 위해 헌신하는 노동운동'이 없어서 쌍용자동차 사태가 발생했다는 말이다. 이런 생각은 최근 한국 진보세력에게 떠돌고 있는 '합리적 좌우의 소통'이나 '합리적 진보와 보수의 대화합'에 대한 '담론'을 연상시킨다. 장하준 교수의 영향 때문인지, 이제 기업과 노동운동의 대화합은 '진보적 대안'으로 기정사실화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논리들을 뒷받침하는 가장 큰 기조는 바로 시장과 국가를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의 진보세력들은 대체로 신자유주의를 가리켜 국가의 힘을 약화시키고 시장의 힘을 극대화하는 '탈규제'의 경제체제라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패니치와 코닝스(Leo Panitch and Martijn Konings)가 지적하는 것처럼, 신자유주의는 정부의 퇴거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기능을 통해 새로운 규제를 시장에 강제한다.
이런 규제의 방식은 딱히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관철이라기보다, 오히려 실용주의적인 것이다. 이런 사실을 감안한다면, 진보세력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왜 한국 사회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는지,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실용주의에 대한 선호도가 강렬한 한국에서 이데올로기적인 측면만을 부각해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진보세력의 주장은 공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김대중 정부 이래로 한국의 '민주정부'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표방했다기보다, 실용주의적 개혁을 통해 규제를 재조정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두고 복지정책에 많은 예산을 썼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정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건 신자유주의 체제의 작동방식을 잘 모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쌍용자동차의 문제에서 혼란을 느끼는 건,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에서 재현하는 신자유주의와 실제로 작동하는 신자유주의 사이에 가로놓인 괴리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본다면 신자유주의는 실용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 비판을 통해 신자유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대중화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무력한 상황에서 '이명박 반대=신자유주의 반대'라는 해괴한 공식을 붙들고 이길 수 없는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게 지금 진보세력이 처해 있는 현실이다. 쌍용자동차 사태에서 주목해야할 건 바로 노사 간의 협상을 결렬시킨 하나의 사안에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결정적으로 노사의 대화를 어긋나게 만든 그 사안이 무엇인가? 이정환 기자도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바로 쌍용자동차 직원이라는 신분을 유지하게 해달라는 노조측의 주장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다른 기사가 있다.
한 명도 해고는 안 된다? 쌍용차 협상 결렬의 진실 물론 이게 '진실'이지만, 진리는 이 진실의 배면에 뫼비우스의 띠처럼 엮여있는 것 같다. 이 진리를 인지하기 위해 우리는 질문을 뒤집어서 사측에게 되물어봐야한다. 도대체 사측은 왜 노조측의 안을 수용하지 않은 걸까? 과연 노조측이 제시한 안이 그렇게 부당한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노조측은 "이미 8개월 무급휴직과 유급 순환휴직 등에 합의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회사로서 손해볼 일은 없다. 그런데 왜 사측은 이런 노조측의 안을 거부한 것일까? 이건 한나라당이 정치적 생명을 걸고 미디어법을 통과시킨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신자유주의는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 복지국가를 공격하고, 국가에 대한 시장의 우위를 주장하지만, 실제로 이런 주장과 다르게 작동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신자유주의가 관철시키고자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미국 금융자본의 이해관계이고, 이에 대한 제도적인 연결고리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미국을 살찌워서 거기에서 떨어지는 떡고물을 얻어 먹겠다는 것, 다시 말해서 미국 금융자본을 중심으로 피라미드적인 위계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 신자유주의 개혁의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쌍용자동차는 지난 해 금융위기를 통해 재편되고 있는 전후 미국 중심 자본주의 체제의 입장에서 본다면, 청산해야할 과잉투자의 잔재이다. 이런 논리에서 이명박 정부는 쌍용자동차 청산 방침을 굳힌 것이고 사측은 이를 따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라져야할 회사를 붙들고 있는 건 정부도 회사도 아닌 노동자들이다. 현실은 이렇다. 유럽인들이 '복지국가'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듯이, 쌍용자동차를 지키기 위해 한국의 노동자들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지금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싸우고 있는 대상은 사측도, 정부도, 경찰도 아닌, 바로 이 괴물 같은 미국 중심의 금융자본주의 체제 자체이다. 이 체제의 이해관계를 위해 사측과, 정부, 그리고 이들을 재현하는 직접적 물리력인 경찰이 대리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진보세력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쌍용자동차 투쟁의 중요성을 재인식해야한다. 한국 노동운동의 동력이 급격히 중간계급화하고, 이른바 진보지식인들이 기업과 노동운동의 대화합을 이야기할 때, 신자유주의적 규율권력의 규제를 직접적으로 감당해온 그 노동자들의 '주체'가 포기할 수 없는 욕망의 '예외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