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철 비서관이 쓴 3월 18일자 봉하일기를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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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봉하마을 진풍경은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일입니다. 우리 뿐 아니라 세계 다른 나라에서도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그 시골마을에 하루 수천 명이 몰리는 배경을 정확하게 설명해 줄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너무 다른 호기심, 너무 다른 이유, 너무 다른 지역, 너무 다른 나이의 여러 사람들이 대통령을 찾는 배경을 몇 가지 단어로 정리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
비서들도 대통령도 예상하지 못한 봉하마을의 진풍경에 대한 배경이 너무나 궁금하다며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양정철 비서관은 그 이유에 대해 일기 끝마디에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그 곳에 가면 그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가 있기 때문이라는 글을 읽으며 문득 옛 영화 한편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저 역시 여러 사람들이 대통령을 찾는 배경을 몇 마디의 말로 설명해 낼 수는 없겠지만 제가 떠올린 영화를 통해 나름대로 그 배경에 대한 그림을 그려볼까 합니다.
"If you build it, he will come."
소개하는 영화에서 주인공과 관객이 함께 듣는 목소리입니다. 이 대사를 우리말로 옮기면 아마 이렇게 해석되겠지요.
"그것을 지으면, 그가 올 것이다."
이 영화는 미국의 유명한 배우인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을 했고, 필 알덴 로빈슨이 감독을 한 1989년도 작품의 '꿈의 구장(FIELD OF DREAMS)'이라는 제목의 영화입니다.
여러분들도 잠시 짬을 내어 영화를 한 번 감상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저는 1993년에 김영철씨가 쓴 영화평을 참고하여 지금부터 여러 사람들이 봉하 마을을 찾는 배경을 그려 보고자 합니다.
W.P.킨셀라의 실명소설 '맨발의 조'를 토대로 만들어 진 이 영화는 현실과 꿈, 과거와 현재, 저승과 이승을 오고 가는 다소 황당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영상에 담아냅니다.
이 영화를 크게 압축해 보자면 13년 전에 돌아가신 레이(캐빈 코스트너 분)의 아버지와 36살의 평범한 농부가 된 레이가 '꿈의 구장'에서 극적으로 화해하는 장면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레이는 태어나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맨발의 조' 잭슨의 일대기를 들어야 했고, 성장하면서 이질적인 가치관 때문에 아버지와의 사이가 차츰 벌어져 집을 떠나 버립니다.
레이는 집을 떠날 때까지 마이너 리그 야구선수였던 아버지와의 갈등과 투쟁외에는 특별히 기억나는게 없습니다. 그 갈등의 발단은 레이의 아버지가 월드시리즈에서 승부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명예의 전당'의 입성을 거부당한 '맨발의 조'외 8명을 슬퍼하며 옹호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떨어진 채 레이는 결혼을 하고 그해 가을에 아버지는 돌아가십니다. 몇 년 후 레이는 아이오와 주에서 옥수수를 키우는 평범한 농부가 되었고 딸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레이는 환청과도 같은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If you build it, he will come."
그 목소리는 결국 레이로 하여금 옥수수밭을 밀어 버리고 그 곳에다 야구장을 짓게 합니다. 온 사방의 옥수수밭이 하늘과 맞닿은 곳에 덜컥 야구장은 지어 났지만 그런 촌구석에 야구를 하기 위해 찾아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음 해 봄이 왔을 때, 한 사람이 야구장 안에서 야구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슈레스 조'. 승부조작에 연루되어 공산주의자 제거를 전담한 치안판사 출신의 변호사로 인해 야구를 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는 평균 타율 0.408로 2004년까지도 깨어지지 않은 루키 신기록을 가진 실제 인물입니다.
그 다음날부터 '슈레스 조'와 동료들은 레이가 만든 야구장으로 몰려와 야구 연습을 합니다. 그들이 야구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레이는 자신이 한 일이 옳았다고 생각하며 기뻐합니다. 그런데 그 즈음에 레이는 또 다른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Ease his pain."
"그의 고통을 덜어 주라."
레이는 '그'를 찾기 위해 고민에 빠집니다. 그러다 딸의 사친회 자리에서 '그'가 바로 아내가 파시즘(fasism)에 대항하여 논리적인 말을 펼치며 옹호한 '테렌스 맨'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테렌스 맨'은 1960년대 미국의 치열한 학생운동 당시 그 운동을 주도하던 흑인입니다. 그는 우파(보수)의 무관심과 좌파(진보)의 과격함에 질려버려 은둔 생활을 선택했고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사회변혁에 대한 좌절과 패배의식을 안겨준 사람입니다.
레이는 '테렌스 맨'도 야구선수가 되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를 찾아 만납니다. 그런데 테렌스 맨을 만나 그와 함께 양키즈 시합을 보던 도중 레이는 자신이 찾는 인물이 테렌스 맨이 아니라, '문라이트 그레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문라이트 그레함'은 미국 프로야구사에 메이저 리그에서 단 한 게임을 시합하고서 야구계를 떠난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라이트 그레함은 그 좌절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의사로 직업을 바꾸어 조그만 탄광마을의 어린이들을 돌보며 생을 마감한 사람입니다.
이 영화에서 레이와 테렌스 맨이 '문라이트 그레함'이 살고 있다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 문라이트 그레함이 이미 고인이 된 사실에 실망하나 주위의 풍경이 느닷없이 70년대로 바뀌어 있음을 깨닫게 되고, 거기서 생전의 그레함과 만나는 '꿈'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레이는 자신의 야구장에서 그레함의 젊은 날의 꿈을 실현시켜 주고자 제안을 하지만 그레함은 야구를 포기한 이후의 삶에 대한 만족감으로 거절합니다. 테렌스 맨이 야구장을 보고 싶다고 하여 함께 아이오아로 돌아가는 길에 레이는 젊은 날로 되돌아 간 문라이트 그레함을 픽업하게 됩니다.
여기서 잠깐 김영철씨의 글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제가 처음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 한 편의 영화소개가 목적이 아니라 여러 다양한 사람들이 봉하 마을의 대통령을 찾는 배경을 그려보기 위해 글을 쓴다고 했습니다.
저는 말로 표현할 길이 없어 영화를 빌어 그림을 그려 보려고 했지만 이 글을 쓴 필자는 어쩌면 이렇게도 제가 표현하고 싶은 말을 글로 잘 표현했나 싶습니다. 다시 그림을 그리기에 앞서 잠시 쉬는 의미에서 천천히 읽어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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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의 어떠한 힘도 운명을 바꾸어 놓지는 못한다(All the power on earth can't change destiny)." <대부 III>의 대사 중에 나오는 말이다. '개인에 있어서의 운명이란 사회를 놓고 보면 역사이다'라는 말도 있다. 삶이라는 욕구의 선택적 체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운명이란 사후적 개념일 것이다.
그럴 때 어떤 이유에서건 개인이 지닌 삶에 대한 욕구-실현되지 않았을 때 꿈이라고 불려질 것이다-가 좌절되는 아픔은 모두가 경험했었을 터이다. 그러나 모두가 경험한 일이기 때문에 참을 만한 아픔일 수는 없다. 그 아픔은 어쩌면 삶을 포기하게 했을 수도 있지만 견뎌냈으므로 사후적으로 그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이 세 사람의 초대자를 통해 이 영화의 제목이 왜 '꿈들의 마당'인가 하는 윤곽은 잡혀진다. 결국은 좌절된 꿈들을 실현시켜 주는 환상의 파티장 비슷한 장소가 바로 이 구장인 것이다. 이 영화가 이런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면 '아마 나도 알고 보면 훌륭한 놈'이라는 식의 팔불출들의 사교장면 비슷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이 영화는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먼저 이 '꿈의 구장'이 들어선 아이오와의 콘벨트 지역에 대해 좀더 살펴 두자. 아이오와 주의 콘벨트 지역은 미국내에서 상당히 보수적인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자영농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농업지대인데, 1932년 당시는 미국 농민운동사상 가장 규모가 큰 농민운동이 있었던 지역이기도 하다.
농민운동의 역사를 보면 자영농을 중심으로 한 운동이 발생하긴 어렵지만 일단 시작되면 규모와 방식에 있어서 전농민이 격렬한 형태의 싸움을 전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자영농들이 지닌 한계 때문에 '근본적인 싸움'으로의 전개가 안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아이오와 주의 농민운동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 시기를 제외하고는 본래의 보수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또 하나 이 영화와 관련해서 볼 때, 이 지역은 미국의 프로야구가 가장 인기를 못 얻는 지역이기도 하다. 반대로 미식 축구에 대한 열기는 미국에서 남부럽지 않은 지역이다. 이런 지역적 특성을 지닌 곳에서 옥수수밭을 밀어내고 야구장을 짓는 일, 이 일 자체가 엄청난 일이며, 따라서 '꿈' 같은 일인 것이다.
이 영화는 이렇게 '꿈' 같은 일로 시작된다. 여름날 저녁 옥수수밭에서 들리는 '꿈' 같은 소리 때문에 야구장을 지은 레이 킨셀라(케빈 코스트너)는 동네사람들과 친척들에게 미친놈 취급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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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진 문라이트 그레함은 레이의 야구장에 도착한 뒤 야구를 사랑하지만 좌절된 꿈을 가진 선수들이 참여한 꿈 같은 시합을 하게 됩니다. 레이와 그의 아내 애니와 딸, 그리고 테렌스 맨이 지켜보고, 설레고 기쁜 표정의 선수들은 모두 야구에 몰입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레이의 처남이 야구장에 나타납니다. 레이의 처남은 경기를 하고 있는 타자석을 가로질러 지나갑니다. 멀쩡한 옥수수밭을 밀어버려 야구장을 만드는 바람에 파산 직전에 놓인 농장을 팔아 피해를 줄여야 한다며 계약서에 사인을 하라고 요구합니다.
레이의 처남은 레이가 걱정된 것이 아니라 미친놈하고 사는 자신의 동생이 걱정되어 찾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레이는 계약을 거부합니다.
그런 와중에 레이의 딸이 구경하던 벤치에서 떨어져 실신하고, 응급처치도 못하고 안타까워 하는 사이에 '꿈의 구장'의 경계를 넘어 문라이트 그래함이 의사의 모습으로 나타나 레이의 딸을 치료해 줍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레이의 처남 눈에도 그제서야 야구장 안의 선수들이 보이게 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슈레스 조가 민중의 영웅이라고 주장했던 레이의 아버지가 나타나 아들인 레이와 공을 던지고 받습니다. 이미 고인이 되어 만날 수 없어 화해를 할 수 없었던 아버지와의 감격적인 만남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레이는 꿈의 구장에서 소통하며 화해하게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좌절된 꿈을 공유하며 세대와 이념과 사상의 갈등을 치유합니다. 영화 '꿈의 구장'에서 실현하고 싶었던 꿈은 단순한 야구시합이 아니라 바로 인간들의 '꿈', 바로 그것입니다.
꿈의 구장은 좌절된 꿈을 안고 죽은 이들만을 위한 장소는 아닙니다. 현재도 어느 곳이든지 자신의 꿈을 찾아볼 수 있는 곳, 같은 꿈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함께 한 그 곳이 바로 꿈의 구장입니다. 영화는 헤드라이트 불빛이 길게 이어진 끝없는 자동차의 행렬이 야구장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여 주며 끝이 납니다.
이렇게 쓰다 보니 본의 아니게 한편의 긴 영화평 정도로 끝날까봐 조심스러워 노파심에 다시 말하면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여러 다양한 사람들이 봉하 마을의 대통령을 찾는 배경을 그려 보기 위한 것입니다.
레이가 들은 목소리처럼 봉하마을을 찾는 사람들은 어디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인지는 몰라도 다음과 목소리를 들었을 것 같습니다.
"봉하마을에 가면, 그를 만날 것이다."
'그'를 만날 요량이 아니었다면 여느 시골 마을과 다를바 없는 깡촌의 봉하 마을에 길게 늘어선 차동차 뒤 꽁무니를 따라 그렇게 찾아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대통령님의 사저라고 한다면 도시 외곽에 즐비한 펜션이 차라리 크고 화려함의 기준이 되겠지요.
그런데 '그'를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수고하셨습니다." "고향에 잘 내려오셨습니다." "그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큰 일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 편히 쉬십시오." "직접 보니 너무 좋습니다."라고 격려하고 위로한다고 합니다.
조중동문 언론에 세뇌된 어떤 이가 과연 돌이라도 던지지 않을까? 염려스럽기도 했지만, 대개의 선량한 시민들은 대통령님의 좌절된 꿈을 마음 한 구석에 새겨 두었던 모양입니다.
'그'를 만난 뒤 각자의 거처로 돌아가는 차안에서 사람들은 또 다시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모를 이런 목소리를 듣지 않을까요?
"그의 고통을 덜어 주라."
"개인에 있어서의 운명이란 사회를 놓고 보면 역사다."는 말을 다시 꺼집어 내어 말하자면 "노무현 대통령님 개인으로서의 '그'의 운명은 사회적으로 놓고 보자면 역사다."라는 것입니다.
'그'가 역사적 운명의 고통을 짊어지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결코 나만 느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딘가에서 혹은 양심으로부터 "그의 고통을 덜어 주라."는 목소리가 자꾸 들립니다.
그 목소리에 이끌려 봉하 마을로 향하는 자동차의 긴 행렬은 지역주의의 벽도, 세대간의 갈등도, 사상의 부재(不在)도, 가치의 전도(顚倒)도 개방된 봉하마을 안에서 모두 소통하고, 그 차이를 극복하여 통합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꿈'입니다.
영화 '꿈의 구장(Field of Dreams)'에서처럼 봉하 마을은 좌절된 꿈이지만, 같은 꿈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곳입니다. 다만 봉하 마을이 영화 '꿈의 구장(Field of Dreams)'과 다른 차이점이라면 작가 W.P.킨셀라가 소설을 통해, 감독 필 알덴 로빈슨이 영화를 통해서나마 구현하려고 했던 그 꿈을 우리는 현실 가운데서 이루었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밤이 깊은 시간까지 긴 글을 쓰긴 했으나 여러 다양한 사람들이 봉하 마을의 대통령을 찾는 배경을 아무래도 제대로 그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역시 양정철 비서관의 결론으로 저도 또한 갈음하렵니다.
"그 곳에 가면 '그'가 있기 때문입니다."